명성황후생가
일본이 삼국 간섭에 굴복하자 이를 러시아에 대한 굴복으로 해석한 조선의 명성왕후 등은 더욱 친러적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. 즉 친일파 내각을 몰아내고 친러파 내각을 조직하여 자신들의 집권 음모를 추진하는 한편, 러시아에 대하여는 그 후원의 대가로 함경도의 항구 하나를 대여해 준다는 밀약까지 해놓고 있었다.
사태가 이에 이르자 일본공사 미우라[三浦]는 일본의 낭인 오카모토[岡本]가 지휘하는 일당의 자객들을 경복궁에 난입시켰다. 이들 일당들은 경복궁 호위병을 죽이고 호위대장 홍계훈과 궁내부대신까지 살해한 후 옥호루에서 명성왕후를 살해하고 시체에 석유를 뿌려 불살라 버렸다. 그리고 친러파 내각을 몰아내고 친일파를 중심으로 한 내각을 조직하였다. 이 사건을 을미사변(乙未事變)이라고 하는데 이 사건은 국제 간에도 많은 물의를 일으켰다. 미우라 일당은 소환되어 히로시마 법원에서 예심에 회부되었으나 증거불충분이라는 이유로 전원 석방되었다.
* 명성황후 생가에 대하여 *
명성황후 생가는 조선 고종(재위 1863∼1907)의 비 명성황후(1851∼1895)가 태어나서 8살 때까지 살던 집이다.명성황후는 민치록의 딸로 철종 2년(1851)에 태어나 16살에 고종의 왕비가 되었다. 그 후 정치에 참여하여 개화정책을 주도해 나갔으나, 고종 32년(1895) 을미사변 때 일본인에 의해 살해되었다. 능은 청량리에 있었다가 1919년 고종황제가 세상을 떠나자 홍릉으로 함께 합장되었다.명성황후 생가는 숙종 13년(1687)에 처음 지어진 집으로, 그 당시 건물로는 안채만이 지금까지 남아 보존되고 있다. 1996년에 안채는 수리되었고 행랑채와 사랑채, 별당채 등이 함께 지어져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.명성황후 생가는 조선 중기 살림집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집이다.
* 명성황후 기념관에 대하여 *
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아 올바른 역사관을 정립하고자 건립하였으며 명성황후(明聖皇后, 1851~1895) 생가 맞은편에 위치해 있다. 전시실은 면적 520㎡로 명성황후와 고종의 어진 등의 유물·같은 시기에 활약하였던 여흥 민씨들의 유물과 관련 자료들을 전시한다. 명성황후의 친필과 시해당일 일본인이 사용했던 일본도(복제품), 시해장면을 재현한 매직비젼 영상물 등 당시 시대상황을 알 수 있는 각종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. 기념관 옆에 있는 161석의 공연장에서는 명성황후와 관련된 영상물을 단체 관람객들에게 상영하고 있으며, 그 주변으로 명성황후의 개화사상과 민족 자주정신을 계승하기 위하여 명성황후 조각공원을 조성하여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. 생가 옆에 “명성황후탄강구리” <명성황후가 태어나신 옛 마을>이라 새겨진 비석이 세워져 있어 명성황후가 이곳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. 그 옆에는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 선생의 신도비가 있고, 그곳으로부터 우측 산쪽 150m 지점에 그분의 묘가 있다.